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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1987년 1월 13일 하숙집에서 불법 체포된 서울대생 박종철(22)을 경찰이 심문 과정에서 구타, 고문하여 하룻밤만에 사망하게 한 사건이다. 1987년 1월 14일 당시 중앙대 용산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 오연상이 긴급 왕진 요청을 받고 경찰들과 함께 이동한다. 5분 만에 도착해 보니 그곳이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수많은 고문과 불법 수사가 이루어졌던 우리나라의 경찰 역사에 뼈아픈 과거이다. 의사 오연상이 대공분실 509호에 도착해 가장 먼저 본 것은 옷이 금방 더러워질 정도로 물로 흥건했던 바닥이었다. 또한 속옷만 입은 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있던 박종철을 목격한다. 당시 경찰관들은 박종철이 전날 술을 많이 마셨는지 목이 마르다고 해서 물을 주었고 주전자째 벌컥벌컥 마시다가 갑자기 숨을 안 쉬었다고 했다 한다. 하지만 청진기를 몸에 갖다 대 보니 배는 심하게 부풀어 있었고 뱃속에서는 물소리가 나며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한다. 

     

    2. 경찰은 왜 굳이 외부인을 불러 목격자를 만들었을까.

    의사 오연상의 의견에 따르면 경찰은 대공분실과 가장 가까운 병원의 의사를 급히 불렀던 것으로 보아 박종철은 의사를 부를 때까지만 해도 살아있었고 경찰들은 박종철을 살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만약 의사를 부르기 전 박종철이 죽었다면 사망 사실은 은폐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이전의 고문에서 사람들이 사망하게 되면 바다에 시신을 버리거나 폐광 가장 끝에 시신을 유기했었는데 사망하지 않은 상태라 생각했기 때문에 의사를 불렀던 것이다. 그로 인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처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3. 경찰들은 왜 의사에게 박종철을 반드시 살려내라고 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당시 경찰 관련 사건들이 연달이 발생하면서 민심과 언론의 좋지 않았고 상부에서는 자중하자는 지시가 내려왔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경찰들은 의사가 박종철이 사망했다 선고했지만 무시하고 중앙대병원 응급실로 시신을 옮겨 달라 요청한다. 응급실에서 사망한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서다. 사망한 장소가 절대 대공 분장이 되면 안 되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박종철의 죽음으로 당황한 경찰들이 시신을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1층으로 이동하는 동안 의사 오연상은 전화기를 발견하고 경창들 몰래 병원에 연락한다. 곧 병원에 시신이 도착할 예정이니 절대 응급실로 들여보내지 말고 영안실로 보내라 은밀이 요청한다. 그의 말에 따라 병원 응급실 앞에서 교수들이 팔짱을 끼고 진입을 막았다. 이에 경찰들은 어쩔 수 없이 시신을 경찰병원으로 다시 이송하게 된다.

    이로 인해 사건은 결국 검찰에도 알려지게 된다.

     

    4. 언론의 힘

    당시 신문사 사회부 기자 신성호가 아침부터 검찰청을 돌아다니며 밤새 무슨 일이 있었나 취재하고 있던 중 공안과장에게 경찰이 큰 사건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얼핏 전해 듣는다.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전해 들은 사건 이야기를 취재수첩에 메모했고 동료 기자에게 부탁하여 서울대 학적부를 뒤져 박종철이란 학생을 알아낸다. 이때부터 언론을 통해 외부로 사건이 알려졌고 경찰의 갖은 언론통제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언론에 박종철 사망이 연이어 보도되자 치안본부는 단순 쇼크사에 의한 사망이라며 거짓 발표한다. 이제 언론사들은 앞다퉈 취재경쟁을 시작하고 최초 목격자이자 검안의인 의사 오연상에게 기자들이 몰려가지만 경찰의 감시가 걸림돌이었다. 한 기자가 화장실에 오랜 시간 숨어 잠복하다가 화장실에 들어온 오연상과 만나 사건의 내용을 자세히 취재할 수 있었다.

     

     

    5. 직업윤리라는 또 다른 사명감

    당시 국립 과학수사연구소 소속 부검의 황적준이 부검을 맡게 되고 또 다른 조작이 생길지 모른다고 판단한 검찰은 박종철의 시신 부검을 경찰병원이 아닌 한양대 병원으로 장소를 변경하고 소속이 다른 부검의 두 명을 참관시킨다. 부검 결과 사망원인은 쇼크사가 아닌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밝혀졌고 이에 치안본부장은 황적준 박사를 불러내 부검 소견을 바꾸도록 지시한다. 검은돈까지 건네며 압박하는 치안본부장을 보며 황적준 박사는 절대 부검 소견을 수정하면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대로 사망원인을 사실대로 밝히면서 이제는 더 이상 물고문을 했던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경찰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황적준 박사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나오게 되었지만 이후에 한 인터뷰에서 "후회는 하지 않는다.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밝히며 다시 한번 정의와 직업윤리 정신을 보여준다.

     

    6. 진실은 숨길수 없고 빠르게 퍼져나간다.

    이 사건으로 경찰 2명이 구속되고 미신도 어느 정도 잦아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사건 당시 수사반장을 맡았던 조한경 경위와 가장 나이가 어린 강진규 경사가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나머지 3명은 책임을 지우지 않기로 한 것이 밝혀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사실이 알려진 배경에는 이부영 전 의원이 있었다. 이부영 의원은 인천 민중항쟁 시국사건으로 수감 중이었는데 매일 밤 다른 수감방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찬송가 소리를 듣고 그들의 억울함이 궁금해졌다. 알고 보니 그들이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였고 본인들이 총대를 메고 수감생활 중인 것에 억울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부영 의원과 호형호제하던 교도관 한재동에게 밝혀지지 않은 범인의 이름을 편지에 적어 전달했고 교도관은 세상에 달려달라는 이부영 의원의 부탁에 목숨을 걸고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 전달하게 된다.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미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대표신부가 성명을 발표한다. 이로 인해 세상이 들끓게 되고 6월 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영화를 돌이켜보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세상에 알린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정의감이나 의무감이 아닌 직업윤리와 상식에 따른 원칙에 기반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분들의 신념과 노력이 오늘날 우리가 상식이 통하는 시대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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